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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이라 다다치카 (166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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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쓰다이라 다다치카는 1661년에 태어나 1728년에 사망한 인물로, 에도 시대 중기의 다이묘이자 막부의 요직을 역임했다. 단바 가메야마 번주 마쓰다이라 타다하루의 서자로 태어나, 이복 형인 마쓰다이라 타다아키의 양자가 되어 가문을 계승했다. 소바요닌, 교토 쇼시다이, 로주 등을 역임하며 도쿠가와 쇼군을 보좌했고, 특히 교토 쇼시다이 재임 시 강직한 성품으로 명성을 얻었다. 시나노 우에다 번을 다스렸으며, 농민 통제를 강화하고 쌀 납부로의 전환을 추진했다. 셋째 아들인 마쓰다이라 다다치카가 그의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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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이라 다다치카 (1661년)
기본 정보
씨족후지이 마쓰다이라 가문
묘소교토부교토시 구로다니의 곤카이코묘지
신분 및 관직
시대에도 시대 전기 - 중기
막부에도 막부 소바요닌, 교토 쇼시다이, 노주
주군도쿠가와 쓰나요시, 이에노부, 이에쓰구, 요시무네
단바가메야마 번 번주, 무사시이와쓰키 번 번주, 다지마이즈시 번 번주, 시나노우에다 번 번주
관위종4위하・이가노카미, 시종
이름
이름마쓰다이라 다다치카
일본어松平 忠周
개명요주로(어릴 적 이름), 다다노리, 다다치카, 다다야스, 다다요시
다른 이름다다야스, 다다히데, 다다노리
시호없음
계명간기인 고요 겟칸 엔신 다이고지
영명없음
생애
출생만지 4년 4월 19일 (1661년5월 17일)
사망교호 13년 5월 1일 (1728년6월 8일)
가족 관계
부모아버지: 마쓰다이라 다다하루, 어머니: 호주인, 양아버지: 마쓰다이라 다다아키
형제다다토시, 다다아키, 다다치카, 딸
배우자마쓰다이라 사다토키 양녀, 요네쿠라 마사아키라 양녀, 이시이 씨
자녀다다치카, 데쓰지로, 다다요시, 후지이 다다토모, 후지이 다다히로, 히로하시 가네아키의 부인, 도카와 야스토시 정실, 도카와 야스토시 계실, 야하타 미쓰키요 부인, 기무라 모리요시 부인 등
경력
가메야마 번 (단바 국) 번주 (후지이 마쓰다이라 가문)전임: 마쓰다이라 다다아키
후임: 구제 시게유키
임기: 1683년 ~ 1686년
대수: 3대
이와쓰키 번 번주 (후지이 마쓰다이라 가문)전임: 도다 다다마사
후임: 오가사와라 나가시게
임기: 1686년 ~ 1697년
이즈시 번 번주 (후지이 마쓰다이라 가문)전임: 고이데 후사쓰구
후임: 센고쿠 마사아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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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다 번 번주 (후지이 마쓰다이라 가문)전임: 센고쿠 마사아키라
후임: 마쓰다이라 다다자네
임기: 1706년 ~ 1728년
대수: 1대
에도 막부 소바요닌임기: 1685년 ~ 1689년, 1705년 ~ 1709년 (재임)
전임: 마키노 나리사다, 도다 다다토키
후임: 기타미 시게마사, 마나베 아키후사
교토 쇼시다이전임: 미즈노 다다유키
후임: 마키노 히데시게
임기: 1717년 ~ 1724년
대수: 15대

2. 생애

만지 4년(1661년) 4월 19일, 단바 가메야마 번주이자 후지이 마쓰다이라 가 이가노카미 류의 초대 마쓰다이라 다다하루의 서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총명하여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다. 이복형 다다아키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마쓰다이라 다다하루의 명에 따라 다다아키의 양자가 되어 가독을 이었다.

우에다 번에 입봉한 후, 농민에게 명세서 제출과 연공을 벼 대신 쌀로 납부하도록 요구하고, 여러 촌의 촌장을 감독하는 촌역인 및 대촌장을 설치하여 농촌 통제를 엄격하게 했다.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를 측근에서 모시며 소바요닌까지 출세했지만, 도쿠가와 이에노부가 6대 쇼군이 되자 막부 정치에서 멀어졌다. 그 후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8대 쇼군이 되자 재등용되어 교토 쇼시다이를 거쳐 로주로 기용되었다.

교호 13년(1728년) 5월 1일, 에도에서 사망했다. 향년 68세. 뒤는 셋째 아들 다다치카가 이었다.

2. 1. 출생과 가독 상속

만지 4년(1661년) 4월 19일, 단바 가메야마 번주이자 후지이 마쓰다이라 가 이가노카미 류의 초대 마쓰다이라 다다하루의 서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총명하여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복형인 2대 번주 다다아키와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났고, 다다아키는 상속 당시 후사가 없었기에 다다하루의 명에 따라 다다아키의 양자로 지명되었다. 덴와 3년(1683년)에 다다아키가 사망하자, 형의 만년에 태어난 유아인 이시마츠(다다타카)의 상속을 지지하는 가신도 있었으나, 망부 다다하루의 유언에 따라 가독을 이었다.

2. 2. 막부 요직 역임

1683년 타다아키가 사망하자, 형의 늦둥이 아들 이시마츠(타다타카)를 지지하는 가신들도 있었으나, 사망한 아버지 타다하루의 유언에 따라 가독을 이었다.

5대 쇼군 쓰나요시를 측근에서 모시며 소바요닌까지 출세했으나, 이에노부가 6대 쇼군이 되자 소바요닌에서 면직되어 막부 정치에서 멀어졌다. 이후 요시무네가 8대 쇼군이 되면서 다시 등용되어 교토 쇼시다이를 거쳐 로주로 기용되었다.

2. 3. 사망

1728년 5월 1일, 로주 재임 중 에도에서 사망했다. 향년 68세. 뒤는 셋째 아들 다다치카가 이었다. 요시무네도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와카도시요리 (5월 15일 이후는 로주) 오쿠보 쓰네하루에게 은 300매를 들려 조문하게 했다.

3. 연표


  • 1661년(간분 원년) 4월: 출생. 생모는 측실 기무라 씨(가신의 딸).
  • 1667년(간분 7년) 윤 2월: 17세 연상의 이복 형 다다아키의 후계자가 됨.[1]
  • 1679년(엔포 7년) 12월 28일: 종5위하 아와노카미에 서임.[2]
  • 1683년(덴나 3년) 6월 29일: 가독 상속, 단바 가메야마 번 마쓰다이라 가(이가노카미 가) 을 번주로서 계승.[3] 7월 3일, 이가노카미에 전임.[3]
  • 1685년(조쿄 2년) 6월 22일: 와카도시요리에 취임. 전에는 츠메슈. 다다노리를 칭함. 7월 22일, 소바요닌으로 전출. 다다에키를 칭함.
  • 1686년(조쿄 3년) 1월 21일: 무사시 이와쓰키로 이봉. 1만 석 가증(계 ). 그러나 이적 비용이 부족하여, 막부로부터 1만 냥 차용. 이때 가증 1만 석에 대해서는 무슈 이와쓰키 영내가 아닌, 이즈미국의 비어진 땅이 됨.
  • 1689년(겐로쿠 2년) 3월 22일: 소바요닌 어역 면제.
  • 1691년(겐로쿠 4년): 오쿠즈메가 됨.
  • 1697년(겐로쿠 10년) 2월 11일: 단바 이즈시로 이봉. 같은 해 5월, 무슈 이와쓰키의 후임 오가사와라 사도노카미에게 인계. 선견의 가신이, 이즈시의 전임 고데 하리마노카미로부터도 인계를 끝냄. 가중의 이적은 7월 21일부터, 이즈시 입성은 8월 9일.
  • 1705년(호에이 2년) 5월 11일: 소바요닌에 재임. 다다노리를 칭함. 12월 2일, 종4위하로 승서. 이가노카미 여원.
  • 1706년(호에이 3년) 1월 28일: 시나노 우에다로 이봉, 1만 석 가증(계 ). 12월 15일, 시종 겸임.
  • 1708년(호에이 5년) 2월 21일: 에도 번저에 제5대 쇼군 쓰나요시가 내방.
  • 1709년(호에이 6년) 1월 17일: 소바요닌 어역 면제.
  • 1717년(교호 2년) 9월 27일: 교토 쇼시다이에 취임. 다다치카를 칭함.
  • 1724년(교호 9년) 12월 15일: 로주에 취임.
  • 1728년(교호 13년) 5월 1일: 재직 중 사망. 향년 68세.

4. 인물

마쓰다이라 다다치카는 문무를 겸비하고 와카에 조예가 깊었다. 강직한 성품으로 알려져 있으며, 교토 쇼시다이 시절 공경들과 교류하면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아리하라노 나리히라에 대한 논쟁에서 "불의하고 함부로 행동하는 자가 있다면 직무에 따라 용서하지 않고 체포하여 죄를 논하고 형벌에 처하겠다"라고 간언한 일화는 그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3]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그의 강직함을 높이 평가하여 로주로 발탁했다.

5. 가계

항목내용
친부마쓰다이라 다다하루
친모호주인 (기무라 씨, 측실)
양부마쓰다이라 다다아키
정실마쓰다이라 사다토키의 양녀 (마쓰다이라 사다쓰네의 장녀)
계실요네쿠라 마사아키의 양녀 (스즈키 스케노신의 딸)
측실이시이 씨
자녀


6. 평가 및 영향

마쓰다이라 다다치카는 인품과 문무를 겸비하고 와카에도 조예가 깊었던 인물로 평가받는다.[3] 교토 쇼시다이 재임 시절, 공경들과 교류하며 유화적인 인물로 인식되었고, 이세 이야기 강독회 일화는 요시무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로주 발탁의 계기가 되었다. 교호 7년(1722년) 상방(上方, 간사이 지방) 지역의 막부 직제 개혁을 주도하여 교토 쇼시다이의 권한을 축소하고 오사카 마치부교의 권한을 확대하는 등 행정 능력도 보였다.[3]

6. 1. 긍정적 평가

인품과 문무를 겸비하여 뛰어났으며, 와카에도 조예가 깊었다.[3]

교토 쇼시다이 시절, 여러 차례 공경(公卿)들로부터 가회(歌會)에 초대받았다. 그는 호감을 주는 인품으로, 무가(武家)로서는 유화(柔和)한 인물로 여겨졌던 듯하다.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다다치카가 자주 가회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도 특별히 책망하지 않았다. 가회에 함께 참석했던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다다치카는 이세 이야기 강독에도 참가했다. 강독이 끝난 후, 어떤 공경이 아리하라노 나리히라를 부러워하는 발언을 하자, 그 자리에 있던 대부분의 공경들은 이에 찬동했다. 그러나 다다치카는 혼자 자리에서 일어나 "여러 경들의 말씀은 모두 옳지 않습니다. 지금 만약 불의(不義)하고 함부로 행동하는 자가 있다면, 저는 동부(東部)의 목대(目代)이니, 직무에 따라 용서하지 않고 신속히 체포하여 죄를 묻고 형벌을 내릴 것입니다."라고 간언했다. 이 일은 마침내 에도까지 알려졌고, 요시무네는 이 소식을 듣고 "내가 보는 바와 다르지 않다."라며 매우 기뻐했다. 이는 다다치카가 로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3]

또한 교호 7년(1722년), 간사이 지방을 뜻하는 상방(上方)에서 시행된 막부 직제 개혁에 있어서도 현지 책임자로서 수완을 발휘했다. 그 결과, 막부 중추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던 교토 쇼시다이의 권한은 축소되어 로주의 감독을 받게 되었고, 반대로 이전부터 로주의 감독 하에 있던 오사카 마치부교(町奉行)의 직무는 확대되었다. 다만 쇼시다이가 실제로 로주의 감독을 받게 된 것은 다음 대 쇼시다이인 마키노 히데나리 이후의 일이며, 이를 철저하게 추진한 것은 다름 아닌 로주로 부임한 다다치카였다.[3]

6. 2. 종합적 평가

인품과 문무를 겸비하여 뛰어났으며, 와카에도 조예가 깊었다.

교토 쇼시다이 시절에는 여러 차례 공경으로부터 가회에 초대받았다. 호감을 얻는 인품이었는지, 무가로서는 유화한 인물로 여겨졌던 듯하다. 요시무네는 다다치카의 잦은 가회 참석을 전해 듣고도 특별히 책망하지 않았다. 그 가회 동료의 전언에 따르면, 이세 이야기 강독에도 참가했다. 강독이 끝나고 어떤 공경이 아리하라노 나리히라를 부러워하는 발언을 하자, 그 자리에 있던 공경들은 대부분 찬동했지만, 다다치카 혼자 자리에서 일어나 "여러 경들의 말은 모두 옳지 않소. 지금 만약 불의하고 함부로 행동하는 자가 있다면, 짐은 동부의 목대이니 직무에 따라 용서하지 않고 신속히 체포하여 죄를 논하고 형벌에 처하겠소."라고 간언했다. 이 일로 인해 마침내 에도까지 소식이 전해졌고, 요시무네는 이 소식을 듣고 "내가 보는 바와 다르지 않다."라며 매우 기뻐했다. 이는 로주 발탁의 시초였다고 한다.

또한, 교호 7년(1722년)에 시행된 상방(上方, 간사이 지방)에서의 막부 직제 개혁에도 현지 책임자로서 수완을 발휘했다. 그 결과, 막부 중추로부터 일정한 독립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던 교토 쇼시다이는 권한이 축소되어 로주의 감독 하에 놓이게 되었고, 반대로 이전부터 로주의 감독 하에 있던 오사카 마치 부교의 직무가 확대되었다. 다만, 쇼시다이가 실제로 로주의 감독 하에 놓이게 된 것은 다음 대의 마키노 히데나리 이후의 일이며, 이를 철저하게 추진한 것은 다름 아닌 로주로 전임한 다다치카였다.[3]

참조

[1] 서적 Secret Memoirs of the Shoguns: Isaac Titsingh and Japan, 1779–1822 2006
[2] 서적
[3] 서적 近世中期の京都所司代の引渡とその権限 吉川弘文館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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